1. 폴 고갱의 자화상
광륜과 뱀이 있는 자화상 혹은 그냥 자화상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폴 고갱이 1889년 그린 작품입니다. 고갱이 프랑스 북서쪽에 있는 어촌마을 르 폴뒤에서 지내던 브리타니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폴 고갱은 1889년부터 1년간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친구 메이저드 한과 함께 마리 헨리 인에서 지내면서 한과 고갱은 자신들의 작품으로 집의 인테리어를 꾸몄습니다. 이 자화상은 고갱이 나무문에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자화상은 빈센트 반고흐, 폴 세잔, 렘브란트 등 많은 화가들의 대표적인 작품이 많지만, 폴 고갱의 작품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머리 위에는 광륜이 있고, 그림 뒤에는 선악과를 연상시키는 사과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고갱의 손에는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연상시키는 뱀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갱은 종교적 상징을 사용했는데, 고갱은 자신이 작품을 창조하는 것을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에 비교하고는 했었다고 합니다.
2. 타히티에서의 삶과 작품
고갱의 예술적 전환점은 타히티로의 이주에서 시작됩니다. 1891년, 그는 프랑스의 문명 세계에서 벗어나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환경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타히티로 떠났습니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원주민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직접 경험하며 그들의 미술적, 정신적 요소를 작품에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타히티에서의 고갱의 작품은 그의 예술적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 전통적인 문화와 신화 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타히티의 여성들》(1891), 《타히티의 마르크와 여인들》(1892),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1897) 등이 있습니다. 고갱의 타히티 작품은 자연과 인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이국적인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여 독창적인 미학을 선보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삶을 통해 단순히 새로운 문화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깊은 내면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는 문명화된 서구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 상태에서의 원시적이고 순수한 삶을 추구했으며, 이를 통해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3. 고갱의 예술적 혁신
고갱의 예술은 그 당시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특히 상징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의 중요한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색채의 사용에서 대담한 실험을 했으며, 종종 단순하고 대조적인 색조를 사용하여 감정과 분위기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고갱은 인물의 특징을 과장하거나 변형시켜 심리적인 깊이를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대신, 상징적이고 시각적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작품을 더욱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단순화된 형태와 비례는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 고갱의 후계자들
고갱은 현대 미술, 특히 야수파와 입체주의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색채 사용과 형태에 대한 탐구는 피카소와 마티스를 비롯한 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갱은 또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후기에 중요한 예술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5. 빈센트 반 고흐와의 갈등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프랑스 아를에서 함께 살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의 중요한 예술가였고, 처음에는 서로의 작업을 존경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고갱과 고흐는 예술적 접근 방식이 달랐고, 서로 다른 성격과 작업 스타일로 인해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흐는 색채와 감정적인 표현을 강조했으며, 그와는 달리 고갱은 보다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둘은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고갱은 고흐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아를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 유명한 사건이 바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입니다. 고흐는 고갱과의 갈등 후,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고, 결국 귀를 자르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고갱은 이 사건에 대한 후유증을 겪었으며, 이는 그와 고흐의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6. 경제적 어려움과 방황
고갱은 예술가로서의 경력 초기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종종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자 직업을 갖고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주식 중개인으로서 일정한 수입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예술을 위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경제적 어려움은 타히티로의 이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많은 작품을 제작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자 했지만, 여전히 빈곤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타히티에서 겪은 빈곤과 외로움은 그의 예술에 더 깊은 감정을 불어넣었고,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상징적이고 감성적인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7. 마르키즈 제도에서의 고립과 죽음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삶을 마친 후, 마르키즈 제도로 이주하여 더욱 고립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190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갱의 마지막 시간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보냈으며, 그의 예술적 업적에 대한 인정은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고갱이 예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비전을 완성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갱의 유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평가를 받았고, 그는 오늘날 현대 미술의 중요한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